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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도시와 인간

어느날 늦은 오후 창원 상남동에 위치해 있는 한 극장의 상영관. 영화가 시작되려면 아직도 한 10분 남짓 남았지만, 상영관 스크린 앞쪽 좌석에는 미리 도착해서 자리잡고 조용한 목소리로 소근되는 관객들 몇몇이 보인다. 상영관 스크린에서 가장 가까운 좌석에는 한 노부부의 푸근하면서 안정된 뒷모습이, 그리고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좌석에서 그리 멀지않은 열쪽엔 경쟁하듯 서로를 꽉 껴안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젋은 커플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우연히도 이 한 공간에 나를 포함한 각각의 세대를 대표하는 익명의 사람들이 다함께 모이게 되었다. 잠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순간 나는 상영관이라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공간을 오감(五感)으로 동시에 공유하는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이 짧은 시간이나마 서로서로를 의식해가며 자신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일종의 거울처럼 서로서로 마주하는 듯한 묘한 육감(六感)을 느낀다. 상영관이라는 이 작은 공간이 현재 우리들이 시공을 초월해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소통·교감해가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의 축소판인 것처럼.

도시는 그곳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일상에서 발산해내는 다양한 감정과 에너지로 가득차 있다. 특히, 한정된 공간에 아주 조밀히 살아가고 있기에, 타인의 탄생·기쁨·슬픔·죽음 등을 각종 대중매체 및 주위 환경과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감정의 공기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자주 접하곤 한다. 공항 라운지에 있으면서 그곳을 지나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만들어 내는 다양한 형태·성격의 인간관계와 희노애락의 감정 혹은 아우리에 취해 잠시나마 흥분됨과 동시에 피곤함, 심지어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도시와 인간시공(時空) 초월한 소통·교감의 관계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5년도 개봉작 <킹덤 오브 헤븐>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중세 유럽인들의 제1차 십자군원정(1096-1099)이후 예루살렘 왕국 최초의 통치자로 군림했던 고드프리의 아들인 발리안은 험난한 여정을 거쳐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된다.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나서 몇일 후 자신의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은 영지로 이동한 발리안은 그의 아버지가 머물렀던 성 안에 들어서자마자 벽 한켠에 ‘quod sumus, hoc eritis’라고 씌여진 한 라틴어 문구를 발견하고는 잠시나마 생각에 잠긴다.

‘quod sumus, hoc eritis’를 한글로 번역하면 ‘현재의 우리가 곧 너희의 미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우리의 현재가 축척된 과거의 결과이며, 현재가 곧 우리의 미래를 규정한다 라는 다층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시간·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가 그의 1961년도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정의하는 역사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하다. 즉, 에드워드 카(E. H. Carr)는 역사를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역사가와 사실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하였으며, 이는 과거와 현재가 지속적인 상호관계를 통해 서로를 배워가고, 더욱더 깊게 이해시키는것이 바로 역사의 기능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말해, 과거없는 현재와 미래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도 관계성을 찾을 수 있다. ‘메멘토 모리’의 유래는 로마 공화정 시대까지 올라간다. 이 시기에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허락되는 개선식은 로마인으로써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었다. 그래서 개선장군은 얼굴을 붉게 칠하고 네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전차를 탄 ‘살아있는 신’이 된다. 그러나 전차 뒤에는 노예들이 같이 탑승하여 ‘메멘토 모리’를 외치게 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겼지만 언젠가 당신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지금 승리했다고 자만하지 말고 패배와 죽음을 대비하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공간·환경 그리고 그곳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서로 교감·소통하며 살아왔다는 ‘과거’를 망각한체 각자의 반복된 일상 혹은 ‘현재’를 살아가는 듯하다. 자연환경·기후변화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처해나가는 다양한 야생동·식물들처럼 말이다. 초인적인 힘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화려하게 내비치는 소수의 ‘보여주기식의 영웅’이 아닌 자신의 엄청한 능력을 인식하지 못한 체 일상을 그냥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다수의 ‘보이지 않은 작은 영웅들’처럼 말이다.

사람들 없이 도시는 존재할 수 없고, 반대로 도시가 사라지게 되면 그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해온 사람들 또한 정착을 위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나서기 위해 결국 또 다시 여기저기로 뿔뿔히 흩어져 지구 어딘가로 유유히 사라져 버리게 된다. 다시말해, 도시를 가장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이 밀집된 공간에서 아주 다양한 형태의 삶들을 살아가는 사람과 그들의 다양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그들의 다채로운 일상들이 다층적으로 침전되어 있는 도시 그 자체인 것이다. 심지어, 프랑스 문화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도시를 ‘인간이 만든 가장 뛰어난 발명품’이라고까지 평가한다. 건축가 승효상씨는 이탈로 칼비노의 저서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도시의 진정한 진실·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도시의 진정한 가치는 이탈로 칼비노가 표현한 대로 “위대한 기념비적 건축에 있는 게 아니라 거리의 모퉁이, 창문의 창살, 계단의 난간, 가로등 기둥과 깃대, 그리고 부서지고 긁힌 온갖 흔적들”에 있다. 도시의 진실은 우리의 일상적 풍경에 놓여 있다. 이런 언설의 배경에는 도시가 익명성을 전제로 형성된 공동체라는 전제가 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헤어지는 도시의 물리적인 공간, 즉 광장과 공원, 거리, 건물들의 틈새, 그리고 디지털 가상 공간의 조직과 구성은 도시 공동체의 성패를 가르는 도시의 본질일 수밖에 없다’ (출처: http://about.seoulbiennale.org/en/intro).
 

도시와 인간공존(共存공생(共生) 커뮤니티

영화상영이 끝나고 밖을 나서니 바깥하늘은 상영관과는 그리 차이가 없는 듯 어둑어둑하기만 하다. 창원광장쪽을 바라보니 원형(圓形)의 광장 테두리는 저녁 퇴근하는 수많은 차량불빛들의 띠로 둘러져 있다. 잠시나마, 끊임없이 오고 가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이 발산해내는 기쁨, 흥분, 슬픔, 외로움 등 다양한 감정들로 가득찬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주변의 저녁풍경을 보는 듯하다.

도시와 사람, 이 ‘둘’은 각자의 생존과 행복을 위해 서로 공존·공생한다. 이러한 공존·공생적 관계는 필시 ‘사랑’과 ‘사람’ 사이에서 우연처럼 형성되는 필연적 관계와도 비슷한 듯하다. 컴퓨터 키보드에 실수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치면 ‘사람’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실수로 ‘사람’이라는 단어를 치면 ‘사랑’이 되기도 하듯이,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이런 우연 혹은 필연적으로 만들어 졌을 법한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랑들’의 만남이 반복되고 그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가는 과정이 바로 ‘인생’인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과거의 도시와 그곳을 살아갔던 사람들, 그리고 현재의 도시와 그곳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미디어를 이용해 시공을 초월한 대화·소통을 끊임없이 해나가고, 이를 통해 각자의 과거를 되새기고, 각자의 현재를 살아가며, 각자의 미래를 꿈꾼다.

이홍렬  

도시와 인간 저작물은 자유이용을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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